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존재를 인식한다!
화폭에 담긴 소재는 듬성듬성 몇 개의 돌멩이다. 물도 없는 물가, 고요하고 정적인 자연 속에 멈춰진 시간의 모습도 함께 한다. 소음과 혼란, 긴장이 사라진 정적. 그의 그림은 표현하지 않으면서 강조한다. 김철성 화백의 <데코룸(Decorum)> 즉 ‘어울림’이라는 의미는 화폭에 재현되지 않는다. 그 작품속 주체가 객체와 어울리고 작품이 공간과 어울리며 그 속에 포함된 간결한 구상이 추상과 어울리고 존재가 비존재와 어울린다.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의 사물이, 그렇지 않은 모든 존재와 어울리듯 그의 작품은 어디서 선보이듯 자연스럽게 세상을 아우른다.
어울림의 정적(靜的)인 아름다움으로
우리는 불변의 존재와 변화는 같은 상황에서 방황한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김철성 화백의 그림은 의식하고 있다. 그 역시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신적 존재는 아니기에, 그 존재의 성정(性情)을 의식하고 암시한다.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작가 자신도 알아간다. 아마 붓을 놓는 그날까지 그럴 것이다.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한 번에 알아내려 하지 않는 평화가 그의 그림에 깃들어 있다. 존재를 알고 쫓기지 않기에 그의 그림에는 어떤 동요나 파문이 없다. 그가 그린 돌 몇 개에 그의 의식이 담기기에 그걸 읽어 낼 뿐이다. 그런 그의 의식은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 그 자체로 자연인양, 그의 화폭에서 자라난 강아지풀과 실버들, 연꽃, 하늘과 호수, 혹은 바다.
그가 그런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데 신(神)에 대한 의식을 빼놓을 수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은 지식의 담을 넘어서는 사고(事故)를 허용한다. 신은 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확장해 주는 존재다. 확장에 대한 신념이 신앙과 어우러져 작가정신에 담긴다. 이것이 붓으로 세상을 표현하는 화가 김철성이 세상을 인식하는 힘이자 믿음이 된다.
서정적인 생동감으로
김철성의 작품 <생수의 강>은 대담한 붓질과 따뜻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데코룸>이 삶의 이치를 겪는 깨달음을 절제된 양식으로 드러냈다면 <생수의 강>은 좀 더 생동감 있는 감성, 화사한 외면을 드러낸다. 꿈과 상상이 배회하고 기대와 설렘이 동시에 출렁인다. 분위기로 감싸기보다 특별한 이야기로 보는 이를 설득하려 든다.
그가 택한 소재끼리도 적극적으로 소통한다. 다양한 이미지는 서로 만나고 연결된다.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구조를 이룬다. 제목이 드러내는 그대로 영적 충만함이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강물을 먹고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주변은 녹음으르 우거지며 모든 것이 넉넉해진다. 이 작품에는 ‘풍요’가 있다. <생수의 강>은 우리 영혼이 축 처진 화초와 같은 영적 가뭄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마치 사막이 못으로 변화한 이적(異蹟)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적인 사물에 세상을 아우르고, 삶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그의 작품은 삶의 심연에 빠져들기보다는 희망과 긍정을 선사하는 쪽에 초점을 둔다. 그는 허리 질환이 가져온 심한 고통 가운데 신을 만났고, 고통의 시간을 밑거름으로 삶의 가치를 얻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그랬고, 이단의 영에서 헤메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듯 그는 고통 속에서 체험한 초자연적 영적 체험을 실현하고 그런 삶의 여정을 화폭에 담아 왔다.
그가 그린 피조물의 상징성, 그 깊이는 사물의 원형에 실재적으로 담긴다. 헤겔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지만, 이미 존재하고, 눈에 보이는 돌과 물과 하늘을 그린 그림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은 이 때문. 그의 작품에서 순환하는 자연 속에 시간의 흐름은 무색하다. 화폭의 아름다운 피조물 속에는 종교적 성격의 초월과 숭고가 침잠해 있고, 그것이 세상 모든 불안하고 성급한 것들을 끌어당겨 있어야 할 자리에 조용히 가져다 놓는다.
작품의 변화, 그리고 온라인 전시 열며 작품 활동
김철성 화백은 그동안 여러 가지 기존의 유형을 병행하면서 조금씩 새로운 시도를 해오고 있다. 크게 하얀 여백에 돌만 그리는 유형, 돌과 모래 뭍이 살짝 보이는 유형, 돌에 식물을 상단이나 하단에 놓는 유형, 화면을 상하로 나누어 상단에 자연의 단면을 그리거나 추상적인 색면으로 표현하는 유형 등이었다. 2019년 말부터 조금씩 시도하는 유형은 그림에 글씨를 넣는 유형이다. 기존의 화면을 둘로 나누어 배경을 반구상적인 풍경이나 추상적인 색면과 면의 하단에 구상적 형을 넣어 표현하였는데, 새로운 표현의 시도는 그 면을 자연에서 얻은 느낌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면서 그 속에 글씨를 넣는 것이다.
‘원형’이란 실재하지 않아도 늘 우리 삶의 지표가 된다. 우리 마음이 가야 할 곳, 있어야 할 곳을 김철성 화백의 그림은 알고 있는 듯하다. 그 아름답고 고요한 외침은 파괴적 새로움의 흔한 감각과 대조되는 더욱 파괴적 신선함이 아닐까. 김철성 화백은 곧 있을 관악미술협회 창립15주년 기념 온라인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김 화백은 “온라인전시를 통해 많은 관람객들의 작품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볼 수 있었다. 작품을 하나 하나 꼼꼼히 시간을 두고 감상하고 그 느낌과 생각을 마음에만 두지 않고 글로 표현하였다는데서 마음이 뭉클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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